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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 한용운(韓龍雲) 묘

한용운 (1879년~1944년) 본명은 정옥으로 스님이 되었으며 출가하여 얻은 법명이 용운(龍雲)이다 주로 백담사에서 활동했으며 경술국치 이후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등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으며 중국으로 가서 여러 독립군 훈련장을 방문하고 격려하였다 1918년 불교잡지 을 간행했으며 다음 해인 1919년에 백용성과 함께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불교계 대표로 참여하여 체포되었고 옥살이를 하였다 출옥 후에는 시집 을 발간해 문학으로 독립에 대한 소망을 말하였고 불교계 항일 단체 '만당'의 당수로 추대되었다 광복을 1년 앞두고 심우장에서 세상을 떠났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경기도 2024.03.19

구리 오기만(吳基萬) 묘

오기만 (1905년~1937년) 1928년 신간회 배천지회 설립대회 당시 준비위원을 맡아 격문을 배부하려다 일본 경찰에 걸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상해로 망명하여 민족운동 기념일마다 격문을 반포하는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경기도 2024.03.18

구리 조봉암(曺奉岩) 묘

조봉암 (1899년~1959년) 3.1운동에 참여하고 조선노동총동맹 문화부책으로 노동운동을 하였다 조선공산당의 창당을 주도하고 그곳의 주요 리더로서 독립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수감되었다가 해방으로 풀려났다 해방정국에서 중도파로 활동하며 5.10 선거 당시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대한민국 초대 내각에서 농림부장관이 되어 농지개혁을 추진하기도 했으며 제2대 국회에서 국회부의장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제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제3대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했는데 신익희 사후 야권 후보로서 30%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후 진보당을 창당하고 당수가 되어 활동하다 간첩죄 및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 결국 집행되어 세상을 떠났다 훗날 조봉암에 대한 혐의는 정치탄압으로 판단되어 무죄가 선고..

경기도 2024.03.17

서울 이중섭(李仲燮) 묘

이중섭 (1916년~1956년) 도쿄 제국미술학교에서 서양학을 전공하다 분카학원 미술과에 입학하였다 1940년 미술창작가협회전에 출품하여 협회상을 수상하였으며 1943년 같은 협회전에서는 태양상을 수상하였다 결혼 후 강원도 원산에서 살았으나 북한으로부터 많은 억압을 받았고 결국 6.25 전쟁 당시 유엔군이 북진하자 원산을 벗어나 제주도에 정착하였다 하지만 생활고를 겪으며 부산으로 터전을 옮겼고 일본으로 건너간 아내와 두 아들을 그리워하다 영양실조와 정신이상 증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표작으로는 , , , 등이 있다

서울 오재영(吳哉泳) 묘

오재영 (1897년~1948년) 1919년 혈성단에 가입하여 활동했으며 상해 임시정부와 비밀리에 연락하면서 기관지인 독립신문에서도 활동했다 1920년 의열단원 박재혁이 부산경찰서에서 서장에게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했을 당시 상해에서 가져온 폭탄 한 개를 맡아두는 등 박재혁이 거사를 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이 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