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북구 29

서울 이용문(李龍文) 묘

이용문 (1916년~1953년)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군인으로 당시 참모본부인 대본영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데 이곳에서 근무한 일본 육사 출신 조선인은 홍사익과 이용문 둘 뿐이다 해방 후 대한민국 육군에 들어갔고 6.25 전쟁 당시 제9사단 부사단장으로 현리 전투를 펼쳤으며 육군본부 작전교육국장이 되었다 부산정치파동 당시 이종찬 참모총장과 함께 군의 중립을 내세우며 병력 차출을 거부했으며 이로 인해 수도사단장으로 전보되었다 그 후 남부지구 경비사령관이 되어 공비 토벌 임무를 수행하다 전북 남원 상공에서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다 장례는 육군장으로 치러졌으며 묘는 5.16 군사 정변 이후 박정희 의장의 주도 하에 수유리로 이장하였다

서울 김성근(金聲根) 묘

김성근 (1835년~1919년) 공조, 형조, 이조, 예조판서 등을 지내고 궁내부 특진관이 되었다 1900년 이후 의정부 참정, 탁지부대신을 지냈으며 일본으로 망명한 유길준을 체포하여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100원을 기부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기도 하였으나 경술국치가 일어나고 일본 정부로부터 조선귀족 자작의 작위와 5만원의 은사공채가 내려오자 이를 받는 등 친일 행보를 보였다

서울 손병희(孫秉熙) 묘

손병희 (1861년~1922년) 동학농민운동 제2차 봉시 당시 북접의 지휘관으로 남접의 전봉준과 함께 전투에 임했으나 우금치에서 패배하고 동학 교주 최시형이 처형당하자 교주의 직위를 이어 받았다 일본 망명 시절 이용구에게 명령해 진보회를 만들어 자신의 뜻을 실행하게 했는데 일진회와 합쳐지며 완벽한 친일파가 되자 이용구와 분리했으며 동학을 천도교라는 명칭으로 개칭한다 그 후 보성전문학교, 동덕여자의숙 등을 인수해 교주가 되는 등 교육 사업에 힘썼고 1919년 천도교의 대표로서 3.1운동을 주도했으며 기미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서명했다 결국 체포되어 징역 3년 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 병보석으로 풀려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