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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현충원 - 현익철(玄益哲) 묘

현익철 (1890년~1938년) 3.1 운동에 참여한 후 중국으로 망명 가 일제의 기관 파괴와 밀정 숙청에 진력하다 체포되어 3년을 복역하고 다시 망명하였다 통의부에 참여하여 위원장이 되었으며 고려혁명당 결성에 참여하고 여러 단체가 통합되어 국민부가 결성되자 중앙집행위원장 추대되었다 그 후 조선혁명당을 결성해 중앙책임비서가 되는 등 활동을 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이전하자 함께 옮겨 활동하였다 1938년 5월 창사에서 김구, 지청천, 유동열 등과 회합을 하고 있을 때 이운한이 총을 쏘았고 김구와 유동열은 중상, 지청천은 경상을 입었으나 현익철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절명하였고 임시정부에서는 그의 노력과 업적을 기려 국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3.29

서울현충원 - 나중소(羅仲昭) 묘

나중소 (1867년~1928년) 대한제국 무관학교에서 수학하여 육군 정위로 복무하다 군대가 해산되고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선발되어 유학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북로군정서를 조직하였으며 왕청현 사관양성소의 교성대장이 되어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1920년 북로군정서의 참모장이 되어 총사령관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 전투를 이끌어 대승을 거두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신민부가 조직되자 참모부 위원장을 맡았고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3.28

서울현충원 - 안병찬(安炳瓚) 묘

안병찬 (1879년~1921년) 1909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자 변호사 자격으로 여순 법정으로 향했으나 일본 측에서 관선변호사만 인정하고 안병찬의 변호는 인정하지 않았으며 같은 해 이재명이 이완용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자 이면우와 변호를 담당하였다 1911년 일명 '105인 사건' 당시 잡혀 고초를 겪었으며 그 후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청년단 총재가 되어 활동하다 다시 체포되어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병보석으로 가출소하고 바로 중국으로 망명해 임시정부 법무처장을 지내고 고려공산당 중앙위원 등을 지내며 독립운동을 이어가다 반대파인 상해파에게 암살당했다 (마적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설도 있음)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3.27

서울현충원 - 지달수(池達洙) 묘

지달수 (1909년~1969년) 독립운동가 지청천의 맏아들로 한국독립군 총사령관이었던 아버지의 밑에서 복무하였으며 쌍성보 등 중국 각지에서 일어난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한국광복군에 참여하여 광복군 제2지대 2구대장에 임명되었고 후에 조선의용대가 편입되어 광복군이 개편되자 제2지대 2구대 구대부로 배속되어 훈련 및 항일 선전에 힘썼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3.26

서울현충원 - 최수봉(崔壽鳳) 묘

최수봉 (1894년~1921년) 1919년 밀양 장날에 만세 시위를 주도했으며 그 후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1920년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투탄 의거 소식을 듣고 거사를 계획했으며 그 해 12월에 밀양경찰서장이 훈시를 위해 경찰서 직원 19명을 모아놓았을 때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었고 다시 하나를 던졌으나 위력이 약해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그 후 도주했으나 결국 체포되어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3.25

구리 박희도(朴熙道) 묘

박희도 (1889년~1952년) 신학교를 졸업하며 종교인의 길에 들어섰고 YMCA에서도 활동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개신교 대표로 서명했으며 김창준, 이갑성과 함께 최연소 민족대표 33인이 되었다 이 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출옥 후에 흥업구락부, 신간회 등에 참여하는 등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이어오다 후반에 전향하여 일제에 적극 협력하기 시작했다 조선인 징병제 실시를 촉구했으며 조선임전보국단,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언론보국회의 등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곧 풀려났고 한국전쟁 기간 중 사망했다

경기도 2024.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