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반민족행위자 29

남양주 신흥우(申興雨) 묘

신흥우(1883년~1959년)배재학당에서 공부하고 에펜젤러에게세례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후미국으로 유학하여 법학 박사 학위를취득했으며 장인환, 전명운의 재판에서통역을 맡기도 하였다. 귀국 후 YMCA청년회 이사, 배재학당 교장을 지냈으나3.1운동 참여를 거부해서 교사진과 학생들이 교장 불신임운동을 하여 권고사직을당하였다. 1920년 조선체육회 회장을 지내고YMCA 총무를 지내다가 흥업구락부 사건당시 체포되었고 풀려난 후 조선기독교연합회평의원, 조선임전보국단 상무이사 및 총무부장등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는 행보를 보였다해방 후 대한체육회 회장을 지냈고 주일대사를 지냈으며 제2대 국회의원 선거,제2대 대통령 선거에 나섰으나 모두 낙선했고 훗날 민주당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경기도 2024.10.30

포천 청풍군(淸豊君) 묘

청풍군(1890년~1950년)이름은 이해승이다월산대군의 후손인 이건용의 아들이나후사 없이 사망했던 풍선군 이한용의사후 양자가 되며 가까운 황족이 되었다1904년 양할아버지 청안군이 사망하자누동궁 궁주가 되었으며 경술국치 이후조선귀족 후작 작위와 은사공채를 받았다해동은행 대주주, 일선산금 주식회사 이사등을 지냈으며 조선귀족회 회장을 지냈다조선 귀족 대표로 미나미 지로 총독에게육군, 해군 각각 1만원의 국방헌금을 내고조선인 징병제도를 보며 충성스러운 황국신민으로서 대동아공영의 지도자가 되게하려는 어버이의 심정이라며 찬양했다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평의원을 지냈고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과징병령실시감사회 발기인을 지냈다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곧풀려났고 6.25전쟁 당시 납북되었다

경기도 2024.09.09

포천 안준생(安俊生) 묘

안준생(1907년~1951년)황해도 해주에서 안중근의 차남으로태어났으며 아버지가 하얼빈 역에서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고 중국으로건너가 살았으나 일본의 견제로 인해제대로 된 직장도 얻지 못해 생활고에시달리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총독인미나미 지로가 찾아와 이토 히로부미의사당인 박문사에서 열리는 위령제에참여해 히로부미의 아들 분기치에게사과한다면 삶과 안전을 보장해준다고제안했고 안준생은 이를 수락하게 된다1939년 박문사에서 이토 분기치에게사과했고 일본은 이를 대서특필했다이는 독립운동가 뿐만 아니라 일반조선인들에게 큰 분노를 안겨줬고'천하의 불효 자식', '친일 매국노'라며비난을 받게되었으며 김구는 해방이되면 바로 죽여야할 사람이라 분노했다해방 후 귀국하여 조용히 숨어살다가가족, 친척이 보는 앞에서 사망했다

경기도 2024.08.28

남양주 박찬범(朴贊汎) 묘

박찬범(1917년~1986년)박영효의 손자로 아버지인 박일서는박영효보다 이른 1930년에 사망했다1939년 할아버지인 박영효가 사망하자조선귀족 후작 작위를 습작했으며동창광업주식회사 취체역에 선임되고1942년에는 대표취체역에 선임되었다의친왕의 3녀인 이해춘과 혼인하였으나훗날 이혼하여 묘에는 박찬범 홀로안장되어있으며 운현궁 궁주 이우의부인인 박찬주 여사의 남동생이 된다  (부모 박일서 내외 묘)

경기도 2024.08.04

남양주 영혜옹주(永惠翁主) / 박영효(朴泳孝) 묘

영혜옹주(1858년~1872년)조선 철종과 숙의 범씨의 딸로철종은 5남 6녀를 두었으나 모두요절하여 영혜옹주가 유일하게장성해 혼인까지 한 자녀이다1872년 박원양의 아들 박영효와혼인하였으나 3개월만에 사망하여후손을 얻지 못하였으며 참고로조선의 마지막 왕녀이다 박영효(1861년~1939년)박원양의 아들로 어린 시절 큰 형을따라 박규수의 사랑방에 출입하면서오경석, 유홍기 등에게 영향을 받았고김옥균, 서광범 등과 교류하였다1872년 철종의 왕녀인 영혜옹주와혼인하여 부마로 금릉위가 되었으나3개월만에 영혜옹주는 사망했다제3차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왔으며조미수호조약 당시 최초로 태극기문양을 제작하여 사용하였다고 전해진다1884년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 사람들과갑신정변을 일으켜 내각을 수립했으며전후영사 겸 좌포도대장이 ..

경기도 2024.08.03

남양주 흥친왕(興親王) 묘

흥친왕 이재면(1845년~1912년)흥선대원군과 여흥부대부인 사이에서태어난 장남으로 고종 황제의 친형이자영선군의 부친으로 이름은 이재면이다동생이 왕으로 즉위하자 본격적으로관직에 나가 이조, 예조, 병조판서 등을지냈으며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에납치당하자 청나라에 가서 아버지를봉양하고 환국할 당시에도 배종하였다제1차 김홍집 내각에서 궁내부대신을지내고 을미사변 이후 김홍집 내각에서도궁내부대신을 지냈으며 1900년이 되자완흥군(完興君)에 책봉되고 순종 황제가즉위하자 대훈이화대수장을 수여 받았다1910년 8월 15일 흥친왕에 책봉되었으나같은 해 8월 22일 마지막 어전회의에황족 대표로 참석하여 한일병합조약을체결하는 것에 동의하여 9적으로 불리며지탄받기도 하였고 경술국치 이후 친왕의칭호가 사라져 한 달도 사용하..

경기도 2024.07.25

남양주 영선군(永宣君) 묘

영선군(1870년~1917년)흥선대원군의 장손자로 흥친왕의 장남이되며 고종의 조카이고 본명은 이준용이다1886년 흥선대원군이 위안스카이와 함께고종을 폐위시키고 자신을 옹립하려 했으나이홍장에 의해 제지되는 사건이 일어났었다1894년 친일 내각이 들어서자 흥선대원군은다시 한 번 자신을 추대하려 했으나 실패했고군국기무처 의원 김학우 암살사건에 연루되어사형 판결을 받았다가 감형되었고 특사로석방되자 유학을 떠나 일본에 머물렀으나1900년 안경수 쿠데타 사건에 연루되어체포령이 떨어졌고 대한제국은 인도를요청했으나 일본이 거절했고 이에 김형섭,김의선이 자신을 암살하려 왔으나 실패했다1907년 이토 히로부미를 통해 사면을 요청해긴 망명 생활을 끝내고 귀국했으며 같은 해에'영선군'에 봉해지고 육군 참장으로 임명됐다1908..

경기도 2024.07.22

남양주 조동윤(趙東潤) 묘

조동윤(1871년~1923년)신정왕후의 조카인 조영하의 아들로병조참판과 병조판서 대리를 지내고대한제국 선포 후에는 원수부 군무국장을거쳐 육군 참장으로서 군부협판을 지냈다그 후 원수부에서 여러 요직을 지내고궁내부특진관을 거쳐 육군무관학교장을지내고 배종무관장으로 영친왕의 일본유학을 수행하고 동궁무관장이 되었다1910년 육군 부장이 되었으나 얼마 안가경술국치가 일어나고 일본 정부로부터조선귀족 남작 작위를 수작 받고 1920년대한제국의 장교를 일본군으로 임용하는과정에서 육군 부장이었기에 일본 육군중장으로 임용되어 일본군인이 되었다

경기도 2024.05.23

아산 정낙용(鄭洛鎔) 묘

정낙용(1827년~1914년)삼도수군통제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거쳐병조참판이 되었으나 삼도수군통제사 시절저지른 부정 비리로 인해 귀양살이를 하였다후에 사면되어 형조판서, 공조판서 등을 지내고한성판윤, 시종원경을 거쳐 농상공부대신이되어 내각의 일원이 되었고 중추원 의장과궁내부특진관이 되는 등 여러 요직을 지냈다한일병합 과정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으며경술국치 이후 일본에서 내려준 조선귀족 남작작위를 수작받았는데 이것이 너무 기쁜 나머지밤을 새우며 주연을 배풀었다고 전해진다

충청남도 2024.05.20

구리 오긍선(吳兢善) 묘

오긍선(1878년~1963년)미국 루이스빌 의과대학을 졸업하고귀국하여 군산 야소교병원장이 되었다그 후 광주, 목포 야소교병원장을 거쳐정명여학교 교장을 지내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 겸 의사가 되었다가일본 도쿄제국대학에서 피부과를 공부하고돌아와 피부과 과장을 지내고 경성보육원을설립하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학감이되었으나 친일단체 유민회의 평의원이 되었다이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부교장을 거쳐교장이 되었으나 동민회 평의원, 조선교육회평의원, 경성군사후원연맹 부회장 등을 지내고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겸 이사, 조선임전보국단발기인 등 많은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경기도 2024.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