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묘역 65

서울현충원 - 유여대(劉如大) 묘

유여대 (1878년~1937년) 의주동교회에서 장로로 활동하였으며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1915년 졸업하였다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의주동교회에서 담임목사가 되었으며 1919년 양전백, 김병조 등과 함께 이승훈으로부터 3.1운동에 대한 계획을 듣고 참여를 약속했으며 자신이 있는 의주에서 같은 날 만세 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3.1운동 당일 태화관에서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기미독립선언서가 낭독이 되었으나 그 현장에 없었고 의주에서 직접 만세 시위를 지휘하였다 결국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1921년 석방된 후에는 목사로서 종교 활동에 전념하였다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4.08

서울현충원 - 노태준(盧泰俊) 묘

노태준 (1911년~1970년) 독립운동가 노백린의 둘째 아들로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해 군사 훈련을 받고 김구 휘하에 있는 한국특무대독립군에서 활동하다 한국국민당청년단 총무부장을 지냈다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사령부 총무처에서 일했으며 한국광복군 제1지대 간부로 선임되어 산시성 일대에서 공작 임무를 수행하였다 1942년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제2구대장이 되어 훈련, 공작, 정보 수집 등을 하고 미국과의 특수훈련을 마치고 대기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귀국 후 조선민족청년단 조직부장, 신문사 사장, 국무총리 비서실장 등을 역임하였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4.07

서울현충원 - 석호필(Frank William Schofield, 프랭크 W. 스코필드) 묘

프랭크 W. 스코필드 (1889년~1970년) 일제강점기 시기 한국으로 와 선교사가 되었으며 1919년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하자 이갑성을 몰래 만나 한국에서도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냐며 3.1운동이 일어나는데 한 역할을 하였다 그렇게 3.1운동이 일어나자 그 당시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으며 수원 제암리에서 일본에 의해 학살이 일어나자 스코필드는 일본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긴 거리에도 자전거를 타고 잠입했으며 제암리의 학살 현장을 촬영하는데 성공하고 해외에 이를 보도하였다 결국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출국당하였으며 해외에서도 한국인을 도우며 살다가 해방이 되자 1958년 한국에 초빙되어 내한하였고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수여 받았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4.06

서울현충원 - 송병조(宋秉祚) 묘

송병조 (1877년~1942년) 3.1운동에 참여하고 상해로 망명하여 국민대표회의, 신한청녕당에 참여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고 후에는 최창식의 뒤를 이어 의장이 되었다 윤봉길의 상하이 홍커우공원 투탄의거로 일제의 압박이 심해져 임시정부가 이동할 때 함께했으며 임시정부에서 많은 독립운동가가 떠났을 때도 차리석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사수하고 국무위원을 거쳐 국무령, 주석 등 임시정부 수반으로서 광복군 창설을 주도했으나 해방이 되기 전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4.05

서울현충원 - 장진홍(張鎭弘) 묘

장진홍 (1895년~1930년) 광복단에 입단해 활동하였으며 3.1운동 당시 각지를 순회하며 일제의 학살, 고문 등을 조사해 이를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일제의 중요 시설 파괴를 목적으로 폭탄을 제조하여 대구에서 거사하기로 계획하고 폭탄을 전달하는 것까지 성공했지만 상자에서 화약 냄새가 나는 것을 눈치챈 은행 종업원에 의해 제지당했고 길 옆에 두었던 폭탄이 터져 은행 유리창이 깨지고 일본 경찰 수 명에게 중상을 입히는데까진 성공했으나 뒤이어 영천, 안동에서 도모한 거사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후 일본을 피해 도망다녔으나 결국 은신처가 드러나 잡혔고 사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되던 중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국했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4.04

서울현충원 - 최재형(崔在亨) 묘

최재형 (1860년~1920년) 부모를 따라 러시아로 이주해 귀화했으며 어용상인으로 돈을 모아 부자가 되었다 1907년 군대 해산으로 다수의 군인이 러시아로 모이자 군량과 군자금을 제공했고 이범윤과 함께 약 600명의 의병을 모아 대장이 되어 경원의 신아산, 회령의 영산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치르고 노우키에프스크로 돌아왔다 재정난에 빠진 대동공보를 인수했으며 한인중학교를 설립하고 한족민회 회장이 되었다 상해에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초대 재무총장에 선임되었으나 사양하였고 의병들을 모아 일본에 저항하다 체포되어 총살당하였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4.03

서울현충원 - 임치정(林蚩正) 묘

임치정 (1880년~1932년) 안창호와 함께 교포단체인 공립협회를 조직하여 간사로 활동했으며 귀국하여 대한매일신보의 회계사무 업무를 맡아 보았다 1907년 비밀 단체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혹독한 고문 끝에 윤치호, 양기탁, 이승훈, 안태국, 유동열과 함께 주모자 6인으로 지목되어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1914년 특사로 석방되고 이승훈 등과 3.1운동을 계획하고 평안도 일대에서 시위가 일어나는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참여하였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4.01

서울현충원 - 박재혁(朴載赫) 묘

박재혁 (1895년~1921년) 의열단장 김원봉과 연락이 되어 의열단에 가입하였으며 짐 속에 폭탄을 숨기고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부산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부산경찰서를 찾아가 평소 안면이 있던 서장 하시모도를 만나 진기한 고서를 보여준다며 봇짐을 풀고 그 안에 있던 폭탄을 꺼내며 서장을 죽이려는 의도를 밝힌 다음 폭탄을 던졌으나 둘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둘 다 중상을 입고 붙잡혔다 체포 후 사형을 선고 받고 수감되어 고문과 폭탄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고통을 겪다가 단식을 하던 중 결국 옥사하였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3.31

서울현충원 - 이탁(李鐸) 묘

이탁 (1889년~1930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강습소 설립에 참여하였으며 고종의 국장 행렬이 지나갈 때 이완용 등 매국 7적을 암살하려 했으나 순종이 가까이 있어 실행하지 못했다 관전현에서 통합 독립운동 단체가 만들어지자 참여하고 임시정부가 광복군사령부라고 명칭을 인준하고나서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독립운동 단체 통합을 위해 국민대표회주비회가 열리자 서기가 되어 대회를 준비했으며 만주에서 각자 활동하던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자는 3부통일안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3.30

서울현충원 - 현익철(玄益哲) 묘

현익철 (1890년~1938년) 3.1 운동에 참여한 후 중국으로 망명 가 일제의 기관 파괴와 밀정 숙청에 진력하다 체포되어 3년을 복역하고 다시 망명하였다 통의부에 참여하여 위원장이 되었으며 고려혁명당 결성에 참여하고 여러 단체가 통합되어 국민부가 결성되자 중앙집행위원장 추대되었다 그 후 조선혁명당을 결성해 중앙책임비서가 되는 등 활동을 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이전하자 함께 옮겨 활동하였다 1938년 5월 창사에서 김구, 지청천, 유동열 등과 회합을 하고 있을 때 이운한이 총을 쏘았고 김구와 유동열은 중상, 지청천은 경상을 입었으나 현익철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절명하였고 임시정부에서는 그의 노력과 업적을 기려 국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