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묘역 61

서울현충원 - 김상옥(金相玉) 묘

김상옥(1889년~1923년)3.1운동이 일어나고 혁신단을 조직하고혁신공보를 발행하고 배포하여 독립에대한 정신을 사람들에게 고취시켰다김동순 등과 암살단을 조직하여 일제의기관을 파괴하고 요인을 암살할 계획을하다가 발각되어 상하이로 망명하였다이때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1921년 귀국해군자금을 모으고 정세를 파악했으며1922년 폭탄, 권총을 휴대하고 잠입해1923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건물의 일부가 파손되는 등 아수라장을만들고 매부 고봉근의 집에 몸을 숨겼다하지만 은신처가 일본 경찰에게 탄로나자두 손에 권총을 들고 총격적을 벌이며도주했고 추격을 따돌리는데 성공했다효제동 이혜수의 집에서 동상 등을 치료하며은신하고 있었는데 결국 이마저도 발각되고다시 총을 들고 도주했으나 이번에는수가 너무 많았고 무려 약 3..

서울현충원 2024.05.25

서울현충원 - 권준(權晙) 묘

권준 (1895년~1959년) 의열단이 창단 될 당시 참여하고 종로경찰서·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 투탄 의거 등 의열단의 활동 때 자금 조달 활동을 하다 국내에서 잡혀 옥고를 치렀다 황푸군관학교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으며 조선의용대의 비서장으로 활동하다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차장이 되었다 해방 후 정부가 수립되자 육군 대령으로 특채되어 제106여단장, 초대 수도경비사령관, 제103사단장, 서부지구경비사령관 등을 지내고 육군 소장으로 전역하였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4.13

서울현충원 - 조경환(曺京煥) 묘

조경환 (1876년~1909년) 1907년 의병을 일으켜 김태원 의병진의 좌익장이 되었으며 함평, 장성, 영광 등에서 여러 차례 일본군과 교전하며 성과를 올리고 '호남창의대장'이라 칭하며 각 지역의 향교에 독립을 호소하는 격문을 발송하였다 그 후에도 일본군과 싸워 성과를 올리던 중 광주군 소지면 어등산에서 격전 중 전사하였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4.12

서울현충원 - 신돌석(申乭石) 묘

신돌석 (1878년~1908년) 1895년 을미의병이 봉기하자 19세의 어린 나이로 의병을 이끌고 거사했으며 1905년 을사의병이 봉기하자 사람을 모아 다시 의병운동을 재개하였다 1907년 서울을 공격하기 위해 전국에서 의병들이 양주로 모여 13도창의군이 결성될 당시에 신돌석은 경상도 의병을 대표해 10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올라왔으나 그가 평민의병장이라는 이유로 참여시키지 않아 결국 경상도로 다시 돌아와 따로 의병 운동을 전개했다 그렇게 겨울이 되고 봄을 기약하며 부하 집에 은신하고 있었지만 이들 형제의 배신으로 인해 암살당하고 말았다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4.11

서울현충원 - 나인협(羅仁協) 묘

나인협 (1872년~1951년) 1894년 나용환과 함께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였으며 그 후 천도교 도사가 되었다 1919년 손병희, 권동진 등에게 3.1운동에 대한 계획을 듣고 민족대표로 서명할 것을 동의하였으며 3.1운동 당일에 민족대표로서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서 낭독식에 참여하고 체포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석방되었다 그 후로는 천도교 도사로서 활동하였다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4.10

서울현충원 - 박승환(朴昇煥) 묘

박승환 (1869년~1907년) 대한제국 육군 참령으로 복무하던 중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 황제를 강제로 양위시켜려 하자 거사하여 이를 저지하려 했으나 황제에게 해가 끼칠 것을 염려하여 거사하지 못하였다 대한제국군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이 되었고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 해산 통고를 위해 새벽에 대대장 이상의 장교를 통감 관저로 불렀으나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으며 결국 군대 해산식을 강행하자 분개하며 대대장실에서 유서를 남기고 "대한제국 만세"를 외친 다음 권총으로 자결했다 이를 본 장병들은 분개하며 탄약고를 부수고 무장 봉기하여 일본과 전투를 벌였으며 상당수의 군인이 의병으로 전환되어 의병 운동이 강화되는 기틀을 만들었다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4.09

서울현충원 - 유여대(劉如大) 묘

유여대 (1878년~1937년) 의주동교회에서 장로로 활동하였으며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1915년 졸업하였다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의주동교회에서 담임목사가 되었으며 1919년 양전백, 김병조 등과 함께 이승훈으로부터 3.1운동에 대한 계획을 듣고 참여를 약속했으며 자신이 있는 의주에서 같은 날 만세 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3.1운동 당일 태화관에서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기미독립선언서가 낭독이 되었으나 그 현장에 없었고 의주에서 직접 만세 시위를 지휘하였다 결국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1921년 석방된 후에는 목사로서 종교 활동에 전념하였다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4.08

서울현충원 - 노태준(盧泰俊) 묘

노태준 (1911년~1970년) 독립운동가 노백린의 둘째 아들로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해 군사 훈련을 받고 김구 휘하에 있는 한국특무대독립군에서 활동하다 한국국민당청년단 총무부장을 지냈다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사령부 총무처에서 일했으며 한국광복군 제1지대 간부로 선임되어 산시성 일대에서 공작 임무를 수행하였다 1942년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제2구대장이 되어 훈련, 공작, 정보 수집 등을 하고 미국과의 특수훈련을 마치고 대기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귀국 후 조선민족청년단 조직부장, 신문사 사장, 국무총리 비서실장 등을 역임하였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4.07

서울현충원 - 석호필(Frank William Schofield, 프랭크 W. 스코필드) 묘

프랭크 W. 스코필드 (1889년~1970년) 일제강점기 시기 한국으로 와 선교사가 되었으며 1919년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하자 이갑성을 몰래 만나 한국에서도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냐며 3.1운동이 일어나는데 한 역할을 하였다 그렇게 3.1운동이 일어나자 그 당시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으며 수원 제암리에서 일본에 의해 학살이 일어나자 스코필드는 일본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긴 거리에도 자전거를 타고 잠입했으며 제암리의 학살 현장을 촬영하는데 성공하고 해외에 이를 보도하였다 결국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출국당하였으며 해외에서도 한국인을 도우며 살다가 해방이 되자 1958년 한국에 초빙되어 내한하였고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수여 받았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4.06

서울현충원 - 송병조(宋秉祚) 묘

송병조 (1877년~1942년) 3.1운동에 참여하고 상해로 망명하여 국민대표회의, 신한청녕당에 참여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고 후에는 최창식의 뒤를 이어 의장이 되었다 윤봉길의 상하이 홍커우공원 투탄의거로 일제의 압박이 심해져 임시정부가 이동할 때 함께했으며 임시정부에서 많은 독립운동가가 떠났을 때도 차리석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사수하고 국무위원을 거쳐 국무령, 주석 등 임시정부 수반으로서 광복군 창설을 주도했으나 해방이 되기 전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