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98

서울 손병희(孫秉熙) 묘

손병희 (1861년~1922년) 동학농민운동 제2차 봉시 당시 북접의 지휘관으로 남접의 전봉준과 함께 전투에 임했으나 우금치에서 패배하고 동학 교주 최시형이 처형당하자 교주의 직위를 이어 받았다 일본 망명 시절 이용구에게 명령해 진보회를 만들어 자신의 뜻을 실행하게 했는데 일진회와 합쳐지며 완벽한 친일파가 되자 이용구와 분리했으며 동학을 천도교라는 명칭으로 개칭한다 그 후 보성전문학교, 동덕여자의숙 등을 인수해 교주가 되는 등 교육 사업에 힘썼고 1919년 천도교의 대표로서 3.1운동을 주도했으며 기미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서명했다 결국 체포되어 징역 3년 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 병보석으로 풀려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서울 박찬익 묘 터

박찬익 (1884년~1949년) 1949년 서울 창신동에서 별세하자 처음에 효창공원에 안장하려 했으나 박찬익 선생이 '무성입토'를 원해 그의 유해는 망우리에 안장되었다 그러다 1993년 서울현충원으로 이장하게 되면서 망우리 묘 터는 형태는 그대로 남아있지만 묘비가 쪼개진 채로 방치되는 등 관리가 되지 않는 모습으로 있었다 현재는 정비를 마치고 묘 터라고 말하지 않으면 그냥 묘라고 생각할 만큼 관리되고 있는 모습이다

서울 장덕수(張德秀) / 박은혜(朴恩惠) 묘

장덕수 (1894년~1947년)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신한청년당과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했다가 귀국했을 때 일본에 체포되어 하의도로 유배되었으나 여운형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하여 부사장과 초대 주필을 지냈으며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귀국 후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활동하다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되고 난 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 대화숙 등의 친일 단체에 참여하고 내선일체에 대한 글을 쓰는 등 친일 활동을 했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고 한국민주당의 정치부장, 외무부장을 지내며 수석총무 송진우가 암살되고 사실상 지도자가 되면서 미군정의 파트너로 활동하다가 제기동 자택 청설장을 찾아온 박광옥, 배희범에게 저격당해 암살당한다 박은혜..

서울 이광래(李光來) 묘

이광래 (1908년~1968년) 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극작가로 데뷔하였다 태평양 전쟁 시기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등의 작품을 출품하는 등 친일 행적이 있다 해방 후 극단 '민예'를 조직하여 좌익연극단체와 대항하며 민족예술을 지켰으며 여러 자리를 맡아 민족극의 기반을 다지고 많은 연기자들을 길러냈다

서울 서광조(徐光朝) 묘

서광조 (1897년~1964년) 조선국민회를 조직하고 전라도 지역 책임자로 활동하다 체포되었다 1919년 제주도로 거주 제한을 받고 그곳에서 여자 야학을 신설하여 교육자로 활동하며 이란 주제로 강연을 다니다 일본에게 제지를 당했다 해방 후 전남보도협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전라도 광주에서 군정 연장 반대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되기도 하였다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