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반민족행위자 30

구리 오긍선(吳兢善) 묘

오긍선(1878년~1963년)미국 루이스빌 의과대학을 졸업하고귀국하여 군산 야소교병원장이 되었다그 후 광주, 목포 야소교병원장을 거쳐정명여학교 교장을 지내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 겸 의사가 되었다가일본 도쿄제국대학에서 피부과를 공부하고돌아와 피부과 과장을 지내고 경성보육원을설립하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학감이되었으나 친일단체 유민회의 평의원이 되었다이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부교장을 거쳐교장이 되었으나 동민회 평의원, 조선교육회평의원, 경성군사후원연맹 부회장 등을 지내고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겸 이사, 조선임전보국단발기인 등 많은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경기도 2024.05.07

고양 고희경(高羲敬) 묘

고희경(1873년~1934년)정미칠과 경술국적인 고영희의 아들로경술국치 이후 이왕직 사무관에 임명되어영친왕을 보좌하기 위해 일본에 거주하다귀국했으며 1916년 아버지 고영희가 죽자조선귀족 자작 작위를 수작 받았다가1920년 백작으로 승작되었고 아버지와마찬가지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지내 유일하게 부자로 중추원 고문을 지냈다이외에도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는 등친일 활동을 하여 일본에서 편찬한에 수록되었다

경기도 2024.04.24

고양 고영희(高永喜) 묘

고영희 (1849년~191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고 수신사로 김기수가 일본으로 파견될 당시 수행원으로 함께 가서 일본 물정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그 후 외부협판, 탁지부협판 등 여러 관직을 거치고 일본 주재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었다 귀국 후 황해도관찰사, 경리원경을 거쳐 이완용 내각이 성립되자 탁지부대신이 되어 고종의 퇴위와 군대 해산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정미7조약(한일신협약)에 동의하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1910년 어전회의에서 순종에게 한일병합조약 체결을 강요하였으며 이러한 공로로 경술국치 이후 조선귀족 자작에 봉해지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됐다 매국노 중에서 가장 고령으로 제일 먼저 죽었다

경기도 2024.04.23

고양 김정록(金正祿) 묘

김정록 (1907년~1982년) 조선귀족 남작 김춘희의 손자이며 김교신의 아들로 아버지가 사망하자 조선귀족 남작 작위를 습작 받았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중국 유학 중이라 작위를 받지 않으면 낙인 찍힐 수 있어 어쩔 수 없이 받았다고 해명했으며 습작 자체를 외부에 알리지 않아 주위에서 그가 남작 신분임을 알지 못했다는 점 등을 들어 불기소 처분하고 풀려났다 서울대학교 미학과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연구분야는 동양미학으로 시인 김지하가 존경하는 스승 중 한 명으로 꼽았으며 문화재청장 유홍준도 김정록의 제자이다

경기도 2024.04.22

고양 김춘희(金春熙) 묘

김춘희 (1855년~1924년) 김승집의 아들로 김항집에게 입양되었으며 내각총리대신 김홍집의 조카가 된다 내부협판, 이조참판, 예조참판을 지내고 갑오개혁 당시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됐다 학부협판, 궁내부특진관 등을 지내다 경술국치가 일어나자 조선귀족 남작 작위를 수작받았으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로 임명되어 일제에게 협력하였다

경기도 2024.04.20

구리 박희도(朴熙道) 묘

박희도 (1889년~1952년) 신학교를 졸업하며 종교인의 길에 들어섰고 YMCA에서도 활동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개신교 대표로 서명했으며 김창준, 이갑성과 함께 최연소 민족대표 33인이 되었다 이 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출옥 후에 흥업구락부, 신간회 등에 참여하는 등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이어오다 후반에 전향하여 일제에 적극 협력하기 시작했다 조선인 징병제 실시를 촉구했으며 조선임전보국단,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언론보국회의 등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곧 풀려났고 한국전쟁 기간 중 사망했다

경기도 2024.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