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현충원 - 윤병구(尹炳球) 묘 윤병구(1889년~1929년)의열단의 단원으로 1922년 총독 및 일제고관의 처단과 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경찰서 등을 폭파하기 위한 군자금 모집을유석현, 김지섭 등과 협의하였다. 같은 해에총독부 판사 백윤화에게서 2천원의 자금약속을 받고 유석현과 함께 군자금 수령을위해 집을 찾아갔으나 백윤화의 신고로이미 집에 잠복해 있던 경찰에게 체포됐다결국 중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옥사했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서울현충원 09:00:28
서울현충원 - 이종암(李鍾巖) 묘 이종암(1896년~1930년)대구은행에서 출납계 주임으로 근무하다가만주에서 온 독립운동가들과 비밀결사를조직하고 은행 돈을 가지고 만주로 넘어가무관학교에서 군사학을 배웠다. 길림성에서황상규, 김원봉, 이성우 등과 의열단을조직했으며 폭탄제조법을 배웠다. 1922년상해에서 일본 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를처단하기 위해 작전을 구상했으나 실패한다1925년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밀입국하여 활동했으나 결국 경찰에게체포되어 징역 13년형을 받고 옥고를치르다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5.01.09
서울현충원 - 곽재기(郭在驥) 묘 곽재기(1893년~1952년)3.1운동에 참여하고 만주로 망명했으며그곳에서 김원봉, 황상규, 이종암 등 13명과결사조직인 의열단을 만들어 단원이 되었다1920년 상해로 가서 폭탄 3개와 약품을 사서밀양청년단장 김병환에게 보냈으며 서울로들어와 동지들과 조선총독부 기관을 노리고정황을 밀탐하던 중 경찰에 동지 6명과 함께체포되었고 폭발물도 발견되어 실패하였다옥고를 치른 후 다시 망명하여 만주, 상해 등여러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광복 후 귀국했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6.10
서울현충원 - 김상옥(金相玉) 묘 김상옥(1889년~1923년)3.1운동이 일어나고 혁신단을 조직하고혁신공보를 발행하고 배포하여 독립에대한 정신을 사람들에게 고취시켰다김동순 등과 암살단을 조직하여 일제의기관을 파괴하고 요인을 암살할 계획을하다가 발각되어 상하이로 망명하였다이때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1921년 귀국해군자금을 모으고 정세를 파악했으며1922년 폭탄, 권총을 휴대하고 잠입해1923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건물의 일부가 파손되는 등 아수라장을만들고 매부 고봉근의 집에 몸을 숨겼다하지만 은신처가 일본 경찰에게 탄로나자두 손에 권총을 들고 총격적을 벌이며도주했고 추격을 따돌리는데 성공했다효제동 이혜수의 집에서 동상 등을 치료하며은신하고 있었는데 결국 이마저도 발각되고다시 총을 들고 도주했으나 이번에는수가 너무 많았고 무려 약 3.. 서울현충원 2024.05.25
서울현충원 - 권준(權晙) 묘 권준 (1895년~1959년) 의열단이 창단 될 당시 참여하고 종로경찰서·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 투탄 의거 등 의열단의 활동 때 자금 조달 활동을 하다 국내에서 잡혀 옥고를 치렀다 황푸군관학교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으며 조선의용대의 비서장으로 활동하다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차장이 되었다 해방 후 정부가 수립되자 육군 대령으로 특채되어 제106여단장, 초대 수도경비사령관, 제103사단장, 서부지구경비사령관 등을 지내고 육군 소장으로 전역하였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4.13
서울현충원 - 박재혁(朴載赫) 묘 박재혁 (1895년~1921년) 의열단장 김원봉과 연락이 되어 의열단에 가입하였으며 짐 속에 폭탄을 숨기고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부산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부산경찰서를 찾아가 평소 안면이 있던 서장 하시모도를 만나 진기한 고서를 보여준다며 봇짐을 풀고 그 안에 있던 폭탄을 꺼내며 서장을 죽이려는 의도를 밝힌 다음 폭탄을 던졌으나 둘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둘 다 중상을 입고 붙잡혔다 체포 후 사형을 선고 받고 수감되어 고문과 폭탄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고통을 겪다가 단식을 하던 중 결국 옥사하였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3.31
서울현충원 - 최수봉(崔壽鳳) 묘 최수봉 (1894년~1921년) 1919년 밀양 장날에 만세 시위를 주도했으며 그 후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1920년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투탄 의거 소식을 듣고 거사를 계획했으며 그 해 12월에 밀양경찰서장이 훈시를 위해 경찰서 직원 19명을 모아놓았을 때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었고 다시 하나를 던졌으나 위력이 약해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그 후 도주했으나 결국 체포되어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