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 9

서울현충원 - 민종식(閔宗植) 묘

민종식(1861년~1917년)민영상의 아들로 명성황후와 같은민진후의 후손이 된다.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을미사변이일어나자 충청남도 정산에 은둔했다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정산에서의병을 일으켰으며 연합의병의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충청남도 서부 일대를 점령하고 서부의중심지인 홍주까지 점령하였는데 홍주는서울과의 교통로 때문에 일제에게 큰위협이었고 이에 일제는 서울에 있던일본군까지 파견하여 홍주성에서 혈전을벌였고 결국 의병부대는 패하고 말았다민종식은 몸을 피하고 다시 의병을 모아재기를 도모하다 1906년 체포되었고결국 진도로 유배되었으나 왕실 척족이라는 신분으로 금방 풀려났다하지만 악형의 여독으로 사망했다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9.18

서울현충원 - 문태수(文泰洙) 묘

문태수(1880년~1913년)대한제국군에 들어가 복무하다 군대가해산되자 덕유산을 근거로 삼아 영남,호남 일대에서 의병대장으로 활동했다창의대장 이인영의 이름으로 격문이발해지자 출진해 호남창의대장으로임명되어 서울진공계획을 준비했다하지만 이인영의 부친상으로 좌절되자본래의 근거지로 복귀하여 주재소를공격해 무기를 탈취했으며 일본군과수 차례 교전을 하고 여러 지역에서활동하다 부상을 입고 결국 체포되어대구형무소에서 사형당하였다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6.14

서울현충원 - 강기동(姜基東) 묘

강기동(1884년~1911년)대한제국군 기병 부위로 있다가 군대가해산되자 해산군인으로 의병을 조직했다일본 헌병대에 위장 잠입하여 근무하다가기회를 보고 잡혀있던 의병들을 석방하고무기와 탄약을 훔쳐 의병활동을 전개했다창의한북대장 연기우와 합세해 200여명의의병을 거느리고 포천에서 일본군과 싸워격파했으며 이때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일본은 500원의 현상금을 걸고 체포에열을 다하던 중 원산에서 경찰에게 잡혀용산 일본군 행형장에서 총살당하였다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6.13

서울현충원 - 조경환(曺京煥) 묘

조경환 (1876년~1909년) 1907년 의병을 일으켜 김태원 의병진의 좌익장이 되었으며 함평, 장성, 영광 등에서 여러 차례 일본군과 교전하며 성과를 올리고 '호남창의대장'이라 칭하며 각 지역의 향교에 독립을 호소하는 격문을 발송하였다 그 후에도 일본군과 싸워 성과를 올리던 중 광주군 소지면 어등산에서 격전 중 전사하였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4.12

서울현충원 - 신돌석(申乭石) 묘

신돌석 (1878년~1908년) 1895년 을미의병이 봉기하자 19세의 어린 나이로 의병을 이끌고 거사했으며 1905년 을사의병이 봉기하자 사람을 모아 다시 의병운동을 재개하였다 1907년 서울을 공격하기 위해 전국에서 의병들이 양주로 모여 13도창의군이 결성될 당시에 신돌석은 경상도 의병을 대표해 10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올라왔으나 그가 평민의병장이라는 이유로 참여시키지 않아 결국 경상도로 다시 돌아와 따로 의병 운동을 전개했다 그렇게 겨울이 되고 봄을 기약하며 부하 집에 은신하고 있었지만 이들 형제의 배신으로 인해 암살당하고 말았다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4.11

서울현충원 - 박승환(朴昇煥) 묘

박승환 (1869년~1907년) 대한제국 육군 참령으로 복무하던 중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 황제를 강제로 양위시켜려 하자 거사하여 이를 저지하려 했으나 황제에게 해가 끼칠 것을 염려하여 거사하지 못하였다 대한제국군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이 되었고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 해산 통고를 위해 새벽에 대대장 이상의 장교를 통감 관저로 불렀으나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으며 결국 군대 해산식을 강행하자 분개하며 대대장실에서 유서를 남기고 "대한제국 만세"를 외친 다음 권총으로 자결했다 이를 본 장병들은 분개하며 탄약고를 부수고 무장 봉기하여 일본과 전투를 벌였으며 상당수의 군인이 의병으로 전환되어 의병 운동이 강화되는 기틀을 만들었다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4.09

서울현충원 - 최재형(崔在亨) 묘

최재형 (1860년~1920년) 부모를 따라 러시아로 이주해 귀화했으며 어용상인으로 돈을 모아 부자가 되었다 1907년 군대 해산으로 다수의 군인이 러시아로 모이자 군량과 군자금을 제공했고 이범윤과 함께 약 600명의 의병을 모아 대장이 되어 경원의 신아산, 회령의 영산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치르고 노우키에프스크로 돌아왔다 재정난에 빠진 대동공보를 인수했으며 한인중학교를 설립하고 한족민회 회장이 되었다 상해에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초대 재무총장에 선임되었으나 사양하였고 의병들을 모아 일본에 저항하다 체포되어 총살당하였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4.03

구리 김규식(金奎植) 묘

김규식 (1882년~1931년) 대한제국의 군인 출신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에 합류하여 일본군과 4번이나 접전하여 전과를 올렸다 경술국치 후 만주로 망명하였으며 북로군정서가 조직되자 사단장이 되었고 청산리 전투 당시 보병대대장이 되어 전투 승리에 큰 기여를 하였다 대한독립군단이 조직되자 총사령관이 되었고 자유시참변 후 군대를 다시 모았으며 이범석 등과 고려혁명군을 조직해 총사령관으로서 일제와의 전투에 대비해 왔으나 공산당원에게 피살당하였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경기도 2024.01.30

서울 13도 창의군탑

13도 창의군탑 1991년 8월 14일 동아일보사가 3.1운동 유적 보존 운동으로 건립하였다 1907년 11월 전국 13도에서 모인 의병이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망우리 일대에서 펼친 서울 진공 작전을 기념하는 탑으로 13도 창의군은 총대장에 이인영, 군사장에 허위를 추대하였다 허위는 선봉대 300명을 이끌고 이곳에서 일본군과 혈전을 벌였으나 후속 부대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퇴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