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현충원 90

서울현충원 - 나중소(羅仲昭) 묘

나중소 (1867년~1928년) 대한제국 무관학교에서 수학하여 육군 정위로 복무하다 군대가 해산되고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선발되어 유학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북로군정서를 조직하였으며 왕청현 사관양성소의 교성대장이 되어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1920년 북로군정서의 참모장이 되어 총사령관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 전투를 이끌어 대승을 거두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신민부가 조직되자 참모부 위원장을 맡았고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3.28

서울현충원 - 안병찬(安炳瓚) 묘

안병찬 (1879년~1921년) 1909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자 변호사 자격으로 여순 법정으로 향했으나 일본 측에서 관선변호사만 인정하고 안병찬의 변호는 인정하지 않았으며 같은 해 이재명이 이완용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자 이면우와 변호를 담당하였다 1911년 일명 '105인 사건' 당시 잡혀 고초를 겪었으며 그 후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청년단 총재가 되어 활동하다 다시 체포되어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병보석으로 가출소하고 바로 중국으로 망명해 임시정부 법무처장을 지내고 고려공산당 중앙위원 등을 지내며 독립운동을 이어가다 반대파인 상해파에게 암살당했다 (마적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설도 있음)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3.27

서울현충원 - 지달수(池達洙) 묘

지달수 (1909년~1969년) 독립운동가 지청천의 맏아들로 한국독립군 총사령관이었던 아버지의 밑에서 복무하였으며 쌍성보 등 중국 각지에서 일어난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한국광복군에 참여하여 광복군 제2지대 2구대장에 임명되었고 후에 조선의용대가 편입되어 광복군이 개편되자 제2지대 2구대 구대부로 배속되어 훈련 및 항일 선전에 힘썼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3.26

서울현충원 - 최수봉(崔壽鳳) 묘

최수봉 (1894년~1921년) 1919년 밀양 장날에 만세 시위를 주도했으며 그 후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1920년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투탄 의거 소식을 듣고 거사를 계획했으며 그 해 12월에 밀양경찰서장이 훈시를 위해 경찰서 직원 19명을 모아놓았을 때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었고 다시 하나를 던졌으나 위력이 약해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그 후 도주했으나 결국 체포되어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3.25

서울현충원 - 채명신(蔡命新) 묘

채명신 (1926년~2013년) 6.25전쟁에 참전하여 활약했으며 특히 '백골병단'이라는 게릴라 부대를 이끌며 다수의 전과를 올렸다 제5사단장 당시 5.16 군사 정변에 적극 가담하였고 초기 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전역을 하는 다른 이들과 달리 계속 군에 남았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파견이 결정되자 주월 한국군 사령관에 임명됐다 이후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으며 세상을 떠날 당시 유언으로 파월 장병이 있는 묘역에 묻어달라고 요청하여 장군임에도 사병 묘역에 안장되었다

서울현충원 2024.02.27

서울현충원 - 박윤관 묘

박윤관 (1956년~1979년) 12.12 군사 반란 당시 반란군에 넘어간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일병으로 우경윤 대령의 지휘 하에 육군참모총장 공관을 점령하여 정승화가 납치된 후 공관 초소 경비 임무를 맡았다 12월 13일 새벽 공관 경비 병력인 해병대가 초소를 탈환하기 위한 과정에서 총격전이 일어났고 그때 머리에 총격을 당해 사망했다 사후 1계급 특진되어 상병이 되었다

서울현충원 2024.02.23

서울현충원 - 정선엽(鄭善燁) 묘

정선엽 (1956년~1979년) 조선대학교 전기공학과 2학년을 마치고 1977년 입대하여 국방부 헌병으로 복무했다 1979년 전역을 3개월 정도 앞둔 상황에서 12.12 군사 반란이 일어났고 정선엽은 처음에 국방부 보안실 경계 근무에 배치되었으나 요충지인 B-2 벙커에 일병 후임이 배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벙커 초병 근무를 자원하여 배치되었다 그렇게 근무 중 B-2 벙커를 장악하기 위해 제1공수특전여단의 공수부대원들이 계단을 따라 내려와 정선엽과 마주쳤고 공수부대원들은 총을 건네달라고 요구했지만 "상관의 지시 없이 총을 줄 수 없다"라며 거절했다 결국 몸싸움이 일어났고 그와 몸싸움을 하던 대위가 그에게 총을 발사, 뒤이어 이어진 공수부대원들의 사격으로 전사했다 사후 44년 만에 모교인 조선대학교에서 명예..

서울현충원 2024.02.22

서울현충원 - 김오랑(金五郞) 묘

김오랑 (1944년~1979년) 육군사관학교를 25기로 졸업했으며 1979년 육군특수전사령관 정병주 장군의 비서실장으로 발탁되었다 12.12 군사 반란 당시 반란군은 정병주 특수전사령관을 체포하기 위해 제3공수여단의 박종규 중령 부대를 투입시켰다 그럼에도 정병주가 끝까지 항전하려고 하자 김오랑은 정병주와 함께 끝까지 맞서 싸웠고 결국 총 6발의 총알을 맞고 전사했다 전사 후 시신은 특수전사령부 뒷산에 가매장되었다가 후에 현충원으로 이장되었고 김오랑의 부인인 백영옥 여사는 시력약화증을 앓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완전히 실명되고 만다 사후 소령에서 중령으로 추서되었다

서울현충원 2024.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