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표33인 19

서울현충원 - 권동진(權東鎭) 묘

권동진(1861년~1947년)평소 유길준, 우범선 등 개화파 인사들과친하게 지냈는데 1895년 을미사변에 연루되어친형 권형진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이때 동학 교주로 망명 중이었던 손병희를만났으며 손병희와 함께 귀국하여 천도교가창건될 당시 대도주가 되어 핵심 인물이 되었다대한제국 시기에 계몽 운동을 하였으나결국 대한제국은 멸망했고 경술국치 후에는천도교 지도자로서 활동하다 손병희, 최린 등과함께 민족대표 33인으로 독립선언문에 서명하고태화관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체포되어옥살이를 살았으며 출옥 후에도 천도교 지도자로6.10 만세 운동을 준비하는데 도움을 줬으며1927년 신간회가 창립되자 부회장을 맡았다해방 후에는 임시정부환영준비위원장을 맡고신한민족당을 창당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5.27

서울현충원 - 이종일(李鍾一) 묘

이종일(1858년~1925년)제국신문을 순 한글로 창간하였으며그곳에서 사장과 기자로서 개화, 계몽 등에앞장섰고 황성신문, 만세보 등에서도 활동했다1905년 천도교에 입교했으며 '천도교회월보'의월보과장을 지내고 천도교 인쇄소인 보성사의사장을 지내며 각종 천도교계 서적을 간행했다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보성사에서 극비로 독립선언문 3만 5천장을인쇄하는데 성공하고 전국에 배포하였다이로 인해 체포되어 3년 형을 선고 받고복역하다 2년 6개월만에 가출옥하였으며1922년 보성사 사람들, 천도교 교인 등과제2의 3.1운동을 계획하고 실천하던 중에발각되어 실패하고 영양실조로 사망하였다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5.26

구리 오세창(吳世昌) 묘

오세창(1864년~1953년)조선 후기 개화파 역관인 오경석의 아들로한성순보의 기자로 활동하고 군국기무처총재비서관을 시작으로 농상공부 참서관,통신원 국장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1902년 개화당 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하던 중손병희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하였으며1906년 귀국 후 대한민보 사장을 지냈다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이로 인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나왔다그 후 서예가로 활동하여 이름을 날렸으며해방 후 서울신문사 명예사장, 민주의원등을 지내고 6.25전쟁 당시 피난지인대구에서 사망하여 사회장이 거행되었다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경기도 2024.04.29

서울현충원 - 나인협(羅仁協) 묘

나인협 (1872년~1951년) 1894년 나용환과 함께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였으며 그 후 천도교 도사가 되었다 1919년 손병희, 권동진 등에게 3.1운동에 대한 계획을 듣고 민족대표로 서명할 것을 동의하였으며 3.1운동 당일에 민족대표로서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서 낭독식에 참여하고 체포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석방되었다 그 후로는 천도교 도사로서 활동하였다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4.10

서울현충원 - 유여대(劉如大) 묘

유여대 (1878년~1937년) 의주동교회에서 장로로 활동하였으며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1915년 졸업하였다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의주동교회에서 담임목사가 되었으며 1919년 양전백, 김병조 등과 함께 이승훈으로부터 3.1운동에 대한 계획을 듣고 참여를 약속했으며 자신이 있는 의주에서 같은 날 만세 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3.1운동 당일 태화관에서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기미독립선언서가 낭독이 되었으나 그 현장에 없었고 의주에서 직접 만세 시위를 지휘하였다 결국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1921년 석방된 후에는 목사로서 종교 활동에 전념하였다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4.08

구리 박희도(朴熙道) 묘

박희도 (1889년~1952년) 신학교를 졸업하며 종교인의 길에 들어섰고 YMCA에서도 활동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개신교 대표로 서명했으며 김창준, 이갑성과 함께 최연소 민족대표 33인이 되었다 이 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출옥 후에 흥업구락부, 신간회 등에 참여하는 등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이어오다 후반에 전향하여 일제에 적극 협력하기 시작했다 조선인 징병제 실시를 촉구했으며 조선임전보국단,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언론보국회의 등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곧 풀려났고 한국전쟁 기간 중 사망했다

경기도 2024.03.20

구리 한용운(韓龍雲) 묘

한용운 (1879년~1944년) 본명은 정옥으로 스님이 되었으며 출가하여 얻은 법명이 용운(龍雲)이다 주로 백담사에서 활동했으며 경술국치 이후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등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으며 중국으로 가서 여러 독립군 훈련장을 방문하고 격려하였다 1918년 불교잡지 을 간행했으며 다음 해인 1919년에 백용성과 함께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불교계 대표로 참여하여 체포되었고 옥살이를 하였다 출옥 후에는 시집 을 발간해 문학으로 독립에 대한 소망을 말하였고 불교계 항일 단체 '만당'의 당수로 추대되었다 광복을 1년 앞두고 심우장에서 세상을 떠났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경기도 2024.03.19

서울 손병희(孫秉熙) 묘

손병희 (1861년~1922년) 동학농민운동 제2차 봉시 당시 북접의 지휘관으로 남접의 전봉준과 함께 전투에 임했으나 우금치에서 패배하고 동학 교주 최시형이 처형당하자 교주의 직위를 이어 받았다 일본 망명 시절 이용구에게 명령해 진보회를 만들어 자신의 뜻을 실행하게 했는데 일진회와 합쳐지며 완벽한 친일파가 되자 이용구와 분리했으며 동학을 천도교라는 명칭으로 개칭한다 그 후 보성전문학교, 동덕여자의숙 등을 인수해 교주가 되는 등 교육 사업에 힘썼고 1919년 천도교의 대표로서 3.1운동을 주도했으며 기미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서명했다 결국 체포되어 징역 3년 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 병보석으로 풀려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