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현충원 - 나인협(羅仁協) 묘 나인협 (1872년~1951년) 1894년 나용환과 함께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였으며 그 후 천도교 도사가 되었다 1919년 손병희, 권동진 등에게 3.1운동에 대한 계획을 듣고 민족대표로 서명할 것을 동의하였으며 3.1운동 당일에 민족대표로서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서 낭독식에 참여하고 체포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석방되었다 그 후로는 천도교 도사로서 활동하였다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4.10
서울현충원 - 유여대(劉如大) 묘 유여대 (1878년~1937년) 의주동교회에서 장로로 활동하였으며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1915년 졸업하였다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의주동교회에서 담임목사가 되었으며 1919년 양전백, 김병조 등과 함께 이승훈으로부터 3.1운동에 대한 계획을 듣고 참여를 약속했으며 자신이 있는 의주에서 같은 날 만세 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3.1운동 당일 태화관에서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기미독립선언서가 낭독이 되었으나 그 현장에 없었고 의주에서 직접 만세 시위를 지휘하였다 결국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1921년 석방된 후에는 목사로서 종교 활동에 전념하였다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4.08
서울현충원 - 석호필(Frank William Schofield, 프랭크 W. 스코필드) 묘 프랭크 W. 스코필드 (1889년~1970년) 일제강점기 시기 한국으로 와 선교사가 되었으며 1919년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하자 이갑성을 몰래 만나 한국에서도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냐며 3.1운동이 일어나는데 한 역할을 하였다 그렇게 3.1운동이 일어나자 그 당시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으며 수원 제암리에서 일본에 의해 학살이 일어나자 스코필드는 일본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긴 거리에도 자전거를 타고 잠입했으며 제암리의 학살 현장을 촬영하는데 성공하고 해외에 이를 보도하였다 결국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출국당하였으며 해외에서도 한국인을 도우며 살다가 해방이 되자 1958년 한국에 초빙되어 내한하였고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수여 받았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4.06
구리 박희도(朴熙道) 묘 박희도 (1889년~1952년) 신학교를 졸업하며 종교인의 길에 들어섰고 YMCA에서도 활동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개신교 대표로 서명했으며 김창준, 이갑성과 함께 최연소 민족대표 33인이 되었다 이 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출옥 후에 흥업구락부, 신간회 등에 참여하는 등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이어오다 후반에 전향하여 일제에 적극 협력하기 시작했다 조선인 징병제 실시를 촉구했으며 조선임전보국단,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언론보국회의 등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곧 풀려났고 한국전쟁 기간 중 사망했다 경기도 2024.03.20
구리 한용운(韓龍雲) 묘 한용운 (1879년~1944년) 본명은 정옥으로 스님이 되었으며 출가하여 얻은 법명이 용운(龍雲)이다 주로 백담사에서 활동했으며 경술국치 이후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등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으며 중국으로 가서 여러 독립군 훈련장을 방문하고 격려하였다 1918년 불교잡지 을 간행했으며 다음 해인 1919년에 백용성과 함께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불교계 대표로 참여하여 체포되었고 옥살이를 하였다 출옥 후에는 시집 을 발간해 문학으로 독립에 대한 소망을 말하였고 불교계 항일 단체 '만당'의 당수로 추대되었다 광복을 1년 앞두고 심우장에서 세상을 떠났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경기도 2024.03.19
수의당 주옥경(朱鈺卿) 묘 주옥경 (1894년~1982년) 명월관(태화관)에서 기생으로 일하다 손병희를 만나 결혼했으며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체포될 당시 남편인 손병희 또한 체포되자 서대문형무소 옆에 단칸방을 얻어 손병희를 옥바라지 하였다 특별시, 광역시, 특별자치시도 2024.02.08
서울 손병희(孫秉熙) 묘 손병희 (1861년~1922년) 동학농민운동 제2차 봉시 당시 북접의 지휘관으로 남접의 전봉준과 함께 전투에 임했으나 우금치에서 패배하고 동학 교주 최시형이 처형당하자 교주의 직위를 이어 받았다 일본 망명 시절 이용구에게 명령해 진보회를 만들어 자신의 뜻을 실행하게 했는데 일진회와 합쳐지며 완벽한 친일파가 되자 이용구와 분리했으며 동학을 천도교라는 명칭으로 개칭한다 그 후 보성전문학교, 동덕여자의숙 등을 인수해 교주가 되는 등 교육 사업에 힘썼고 1919년 천도교의 대표로서 3.1운동을 주도했으며 기미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서명했다 결국 체포되어 징역 3년 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 병보석으로 풀려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특별시, 광역시, 특별자치시도 2024.02.07
서울 봉황각 봉황각 1910년 경술국치로 식민지가 되자 손병희는 천도교 지도자들에게 역사의식을 심어주기 위한 수련장의 용도로 봉황각을 지었고 후에 3.1운동의 구상을 한 발상지가 됐다 건물에 걸려 있는 현판은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인 오세창이 썼다 특별시, 광역시, 특별자치시도 2024.02.06
서울 이명룡(李明龍) 묘 이명룡 (1872년~1956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복역하고 덕흥교회 장로가 되어 종교 활동을 해오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복역하였다 해방 후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에 참여하고 안중근기념사업회 회장 등을 지냈다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특별시, 광역시, 특별자치시도 2023.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