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6

서울 이시무(李時茂) 묘

이시무(1532년~1592년)장례원 판결사를 지낼 당시 임진왜란이일어나자 노구였던 본인 대신 아들인이정립을 보내 선조를 호종하게 했다그에 그치지 않고 왕과 국가의 안정을바라며 매일 산대에 올라 북쪽을 향해네 번 절을 했다고 한다. 결국 일본군에게포위되어 항복을 권유받지만 오히려그들을 꾸짖었고 결국 순절했다. 시호는충민이며 사후 회성군에 봉작되었다

서울 이정립(李廷立) 묘

이정립(1556년~1595년)이시무의 아들로 기축옥사를 다스린공으로 평난공신이 되었으며 임진왜란당시 예조참의로서 선조를 호종했다왕이 금교역에 이르렀을 때 종묘와사직의 위패가 아직 개성에 남아있단소식을 듣고 위험을 무릅쓰고 개성으로달려가 위패를 평양으로 무사히 모셔왔다광림군에 봉해졌고 영의정에 증직됐다

안산 김여물(金汝岉) 묘

김여물(1548년~1592년)의주목사를 지내던 중 서인이었던정철의 파로 몰려 의금부에 투옥되었다그러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그의 뛰어난무략을 알아본 도체철사 류성룡이 옥에서풀어 자신의 곁에 두려고 했으나 도순변사신립 또한 이를 알고 자신의 종사관으로임명해줄 것을 간청하여 함께 출전하였다신립이 충주에서 배수진을 치기로 결심하자이를 반대하며 조령을 점령해 지키자고주장하였으나 채택되지 못했고 결국탄금대에서 왜적과 전투를 벌인 끝에당하지 못해 강에 투신하여 순국했다영의정에 추증되고 순창부원군에 봉해졌다

경기도 2024.07.10

양주 권율(權慄) 묘

권율(1537년~1599년)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이어가던 중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한양이 함락된 후전라도순찰사 이광과 방어사 곽영이 군사를모집할 때 광주목사로서 합류해 북진하다가용인에서 일본군과 만나 싸웠으나 대패했다그 이후 다시 군사를 모아 금산군 이치에서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정예부대와 싸웠는데그들을 대파해 전라도순찰사로 승진하였다수원 독성산성에서 우키타 히데이에의부대를 격파했으며 부대를 나누어 선거이에게시흥 금주산에 진을 치게 한 후 약 3천 명의병사를 이끌고 한강 건너 행주산성에 주둔하며3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온 고바야카와의부대와 격전을 벌여 대승을 이끌어냈다이러한 전공으로 도원수에 올랐으며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다시 일본군과 맞서싸웠으나 명나라 장수들의 비협조적인태도로 크게 싸우지 못하고 퇴..

경기도 2024.04.15

남양주 변응성(邊應星) 묘

변응성(1552년~1616년)공조판서 변협의 아들로 임진왜란이일어나고 경주부윤이 되었으나 경주는이미 점령당해 부임하지 못했으며가평 전투 당시 싸우지도 않고 도망쳐백의종군 했으나 류성룡의 변호로경기방어사가 되어 여주목사 원호와남한강에서 적들을 격퇴했으며 광주,이천, 양주 지역에서 토적을 토벌하고한강 상류 용진에 정착해 병사들을훈련시켰고 후에 훈련대장을 지내고사후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경기도 2023.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