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 29

서울 조성환(曺成煥) 묘

조성환(1875년~1948년)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으나군부의 부패함을 숙청하기 위해 시도하다발각되어 사형을 선고 받았고 후에 감형된 뒤칙령으로 풀려나 육군 참위가 되었으나사직하고 안창호 등과 신민회에 가입했다중국으로 망명하여 무오독립선언에 참여했고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군무차장이되어 활동했다. 서일, 김좌진 등과 함께북로군정서를 조직해 군사부장에 취임하여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대한독립군단부총재에 취임해 무장독립운동을 이끌었다신민부가 조직되자 외교위원장이 되었고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군무총장이되어 중국 정부와 협의해 한국광복군 창설에크게 일조하였다. 한국광복군 대원수부의군무부장, 최고원수부 판공처장이 되어일본과의 전쟁을 준비하던 중 광복이 되자귀국하여 대한독립촉성회 위원장, 성균관..

서울 차리석(車利錫) 묘

차리석(1881년~1945년)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신민회에 가입하여 안창호 등과 대성학교를경영하며 인재를 길렀다. 105인 사건이일어나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고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 운동에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후에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임시의정원 평안도 의원을 거쳐 임시의정원부의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했으며 한국독립당실무 간부로도 활동했다. 임시정부가 존폐의위기에 서게 되었을 때 김구 등과 끝까지임시정부를 지켰으며 이동녕이 주석에선출되자 비서장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하다 광복 소식을 듣고 귀국 준비를 하던 중쓰러졌고 결국 귀국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서울 이유(李濡) 묘

이유(1645년~1721년)광평대군의 후손으로 경신환국 당시서인이 집권하자 승지로 발탁되었다그 후 경상도관찰사, 대사헌 등을 지내고갑술환국 후에는 평안도관찰사를 거쳐호조판서를 지냈다. 병조판서를 지낼 당시양역이정청이 설치되자 구관당상을겸임하며 양역변통문제를 담당하며양역 사무를 크게 정비하는데 일조했다이러한 공으로 우의정에 올랐으며 뒤이어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임명되었고도성 방어 강화를 주장하여 북한산성수축을 완료하였다. 영중추부사가 되고기로소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사후에경종의 묘정에 배향되고 시호 '혜정'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