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6

서울 안중근(安重根) 묘

안중근(1879년~1910년)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고 말타기와사냥에 능했으며 명사수로 이름을 알렸다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따라진압하는데 가담하기도 했으며 가톨릭에입교해 도마[Thomas]라는 세례명을 받았다을사늑약 이후 망명, 의병 활동에 뛰어들어대한의군 참모충장 겸 특파독립대장으로엄인섭 등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일본군과전투를 벌였으나 패하였다. 1909년 동지11명과 동의단지회를 조직해 침략의 원흉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로 결심했고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행동에나서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암살하는데 성공하고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뤼순 감옥에수감되어 사형을 선고 받고 을집필한 후 형집행으로 순국하였다. 현재유해는 봉환되지 못하였으며 효창공원에가묘를..

서울현충원 - 안춘생(安椿生) 묘

안춘생(1912년~2011년)안장근의 아들로 안중근이 5촌 당숙부이다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국민혁명군에서 활동하다 한국광복군제2지대 구대장을 지내며 독립을 준비했으나 일본의 항복으로 이루지 못했다해방 후 육군사관학교 8기를 졸업하고육군사관학교장, 제8보병사단장, 국방부차관보 등을 지내고 중장으로 예편했다제9대 국회에서 유신정우회 의원으로임명되었고 제4대 광복회장을 지냈다전두환 정부 때는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위원, 제1~2대 독립기념관 관장을 지냈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9.30

포천 안준생(安俊生) 묘

안준생(1907년~1951년)황해도 해주에서 안중근의 차남으로태어났으며 아버지가 하얼빈 역에서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고 중국으로건너가 살았으나 일본의 견제로 인해제대로 된 직장도 얻지 못해 생활고에시달리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총독인미나미 지로가 찾아와 이토 히로부미의사당인 박문사에서 열리는 위령제에참여해 히로부미의 아들 분기치에게사과한다면 삶과 안전을 보장해준다고제안했고 안준생은 이를 수락하게 된다1939년 박문사에서 이토 분기치에게사과했고 일본은 이를 대서특필했다이는 독립운동가 뿐만 아니라 일반조선인들에게 큰 분노를 안겨줬고'천하의 불효 자식', '친일 매국노'라며비난을 받게되었으며 김구는 해방이되면 바로 죽여야할 사람이라 분노했다해방 후 귀국하여 조용히 숨어살다가가족, 친척이 보는 앞에서 사망했다

경기도 2024.08.28

서울현충원 - 우덕순(禹德淳) 묘

우덕순(1876년~1950년)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독립운동을 하기로결심하고 안중근, 이범윤 등과 의병 양성에힘썼으며 1908년 경흥, 회령 일대의 일본군영을 습격해 교전하다 체포되고 탈출했다1909년 안중근, 김기열 등과 단지동맹을결성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안중근을만나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는 거사에동참하기로 하고 그에 따른 준비를 했다같은 해 10월 26일, 만주를 순방하러 온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 위해 우덕순은차이자거우 역에서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서대기하였는데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기차는차이자거우 역을 그냥 지나치고 하얼빈 역에정차하였고 안중근은 총으로 암살을 성공한다결국 안중근과 함께 체포되어 뤼순에서 함께재판을 받고 이듬해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았다6.25전쟁 당시 서울에서 피난하지 못했고서울을 ..

서울현충원 2024.06.01

서울현충원 - 안병찬(安炳瓚) 묘

안병찬 (1879년~1921년) 1909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자 변호사 자격으로 여순 법정으로 향했으나 일본 측에서 관선변호사만 인정하고 안병찬의 변호는 인정하지 않았으며 같은 해 이재명이 이완용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자 이면우와 변호를 담당하였다 1911년 일명 '105인 사건' 당시 잡혀 고초를 겪었으며 그 후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청년단 총재가 되어 활동하다 다시 체포되어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병보석으로 가출소하고 바로 중국으로 망명해 임시정부 법무처장을 지내고 고려공산당 중앙위원 등을 지내며 독립운동을 이어가다 반대파인 상해파에게 암살당했다 (마적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설도 있음)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서울현충원 2024.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