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역사문화공원 47

서울 박찬익 묘 터

박찬익 (1884년~1949년) 1949년 서울 창신동에서 별세하자 처음에 효창공원에 안장하려 했으나 박찬익 선생이 '무성입토'를 원해 그의 유해는 망우리에 안장되었다 그러다 1993년 서울현충원으로 이장하게 되면서 망우리 묘 터는 형태는 그대로 남아있지만 묘비가 쪼개진 채로 방치되는 등 관리가 되지 않는 모습으로 있었다 현재는 정비를 마치고 묘 터라고 말하지 않으면 그냥 묘라고 생각할 만큼 관리되고 있는 모습이다

서울 장덕수(張德秀) / 박은혜(朴恩惠) 묘

장덕수 (1894년~1947년)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신한청년당과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했다가 귀국했을 때 일본에 체포되어 하의도로 유배되었으나 여운형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하여 부사장과 초대 주필을 지냈으며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귀국 후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활동하다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되고 난 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 대화숙 등의 친일 단체에 참여하고 내선일체에 대한 글을 쓰는 등 친일 활동을 했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고 한국민주당의 정치부장, 외무부장을 지내며 수석총무 송진우가 암살되고 사실상 지도자가 되면서 미군정의 파트너로 활동하다가 제기동 자택 청설장을 찾아온 박광옥, 배희범에게 저격당해 암살당한다 박은혜..

서울 이광래(李光來) 묘

이광래 (1908년~1968년) 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극작가로 데뷔하였다 태평양 전쟁 시기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등의 작품을 출품하는 등 친일 행적이 있다 해방 후 극단 '민예'를 조직하여 좌익연극단체와 대항하며 민족예술을 지켰으며 여러 자리를 맡아 민족극의 기반을 다지고 많은 연기자들을 길러냈다

서울 서광조(徐光朝) 묘

서광조 (1897년~1964년) 조선국민회를 조직하고 전라도 지역 책임자로 활동하다 체포되었다 1919년 제주도로 거주 제한을 받고 그곳에서 여자 야학을 신설하여 교육자로 활동하며 이란 주제로 강연을 다니다 일본에게 제지를 당했다 해방 후 전남보도협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전라도 광주에서 군정 연장 반대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되기도 하였다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서울 이병홍(李炳洪) 묘

이병홍 (1891년~1955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숨겨와 진주 3.1운동을 돕고 고향인 산청의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참여했으며 해방 후 반민특위 제1조사부장이 되어 친일파 청산에 힘썼으며 제2, 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활동하다 임기 중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이병홍의 묘비는 해공 신익희가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