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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김구(金九) 묘

답사객 2024. 12. 7. 09:00

김구

(1876년~1949년)

조선 왕조 마지막 과거 시험에 응시했으나

떨어졌고 동학에 입도해 동학군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공격했는데 이 사건으로 진사

안태훈의 집에서 은거하며 그의 아들이었던

안중근과 교류하였다.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인 쓰치다를 보고 을미사변으로 죽은

국모의 원한을 풀겠다며 죽여버렸고 결국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고종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사형을 면하였다

신민회에서 활동하다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했고

형기 2년을 남기고 가출옥하게 되었는데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장이 되었다

이후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등을 지내고

국무령 자리에 올라 임시정부를 이끌며

한인애국단을 조직해 이봉창, 윤봉길로

하여금 무장독립운동을 지도하였다

임시정부가 존폐의 위기에 서있을 때도

임시정부를 지켰으며 주석의 자리에 올라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일제에 선전포고를

하며 임전태세에 돌입했다. 중국국민당의

장제스와 협력해 중국군과 함께 광복군이

항일공동작전을 수행하게 했으며 미국과

제휴해 비밀훈련 또한 지휘했다 일제의

항복으로 광복을 맞이했다. 1945년 11월

제1진으로 환국했으며 신탁통치에 대해

반대 입장을 내놓으며 통일 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일본에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유해 봉환을 추친했으며

5.10 제헌의원 선거가 진행되자 이에

반대하고 김규식 등과 함께 평양으로 가

김일성, 김두봉 등과 만나 남북협상을

진행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하지만 통일 정부에 대한 의지를 포기

하지 않고 재야에서 통일 운동을 전개

해오다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였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고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